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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읽기

오염된 단어

by 재테크의 정석 2023.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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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읽기] ‘깜깜이’라는 말은 혐오 표현인가 (naver.com)

[세풍] 문재인 독재의 홍위병(紅衛兵)들 (naver.com)

 

[만물상] 벤츠 차주 마녀사냥 (naver.com)

 

 

질병관리청이 '깜깜이 감염'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에 대하여 사과를 했다.

 

깜깜이라는 단어가 시각장애를 비하하는 차별적 표현이라는 지적을 받아들인 것이다.

앞으로는 '감염경로 불명'으로 변경한다고 한다.

깜깜이의 사전적 정의는 '어떤 사실에 대해 전혀 모르고 하는 행위. 또는 그런 행위를 하는 사람'이다.

깜깜이라는 단어가 차별적, 혐오적 표현이라는 근거가 무엇이기에 질병관리청은 받아들인 것인가.

아무리 찾아봐도 '언어 감수성'이라는 말 이외에는 딱히 근거가 없다.

언어 감수성이란 쉽게 말하면 시각장애인이 불편함을 느꼈다는 것이다.

기분상해죄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재벌은? 기래기는? 판새는? 견찰은?

당사자가 불쾌해한다면 쓰지 말아야 한다는 게 이유라면 깜깜이 외에도 사용을 지양해야 할 단어는 무궁무진하다.

하지만 재벌과 기레기, 판새, 견찰 같은 단어는 아무렇지 않게 쓰이며

오히려 이를 문제 삼는 것은 감수성이 부족한 사람이 되고 만다.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

언어는 시대에 따라 변한다.

깜깜이라는 단어의 정의에 차별적, 혐오적 의미가 없다 해도

시대에 따라 부정적 의미가 추가되었다면 사용을 지양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부정적 의미가 추가되었는지 공론화하여 토론하고 사회적 합의를 맞추어 가는 과정이 동반되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감수성이라는 미명하에 반론 자체가 차단되어 버린다.

아무런 근거가 없더라도 단지 기분상해죄 하나만으로 혐오표현이 되어버린다.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도 없다.

반론을 제기하면 인권감수성이 부족한 사람으로 낙인이 찍히기에, 아무도 반론을 제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동의하지 않는 자들은 반강제적 침묵을 하게 되고

동의하는 사람은 도덕적 우월감에 차올라 목소리를 더욱 높인다.

그렇게 단어는 오염되고 수습할 수 없을 만큼 널리 퍼져서 정론이 되어버린다.

프랑스 철학자 앙드레 콩트 스퐁빌은 이렇게 말했다.

'윤리적이라는 건 내가 해야 할 일에 관심을 갖는 것이고,

윤리주의자가 되는 건 다른 사람이 해야 할 일에 관심을 갖는 것을 말한다.'

윤리적이지 않은 윤리주의자들은 감수성에 기반한 집단행위를 통해 많은 단어를 오염시키고 있다.

더욱 큰 문제는 단지 단어만 오염시키는 데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확인이 되지 않은 것으로 특정인을 사회적으로 매장하고

자신들의 의견과 다른 집단을 악으로 규정하고

편 가르기를 통해 자신들만의 윤리를 관철한다.

감수성 앞에서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윤리적이라는 착각 아래, 정의감을 충족시키는 것만이 목적이다.

그렇기에 뒤늦게 진실이 밝혀져도 반성하는 이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감수성 넘치는 대중독재의 집단주의 사회가 만들어진다.

윤리적이지 않은 윤리주의자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려는 의지도 능력도 없는 자

그런 자들의 세상 속에서 오늘도 어떤 단어는 별다른 이유도 없이

단지 모호한 감수성에 의해 오염되고 만다.

잘 모르고 무식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 무섭다

개그맨 이경규의 말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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